소크라테스는 질문으로 아테네를 뒤흔든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는 조금 이상한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우주의 시작을 설명하는 책을 쓰지 않았고, 하늘의 별을 관찰하며 만물의 재료를 찾지도 않았으며 거창한 철학 학교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직접 쓴 철학 책도 한 권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서양 철학을 이야기할 때는 빠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철학의 역사는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대체 그는 무엇을 했을까요?
간단합니다. 그는 사람을 붙잡고 질문했습니다. “정의란 무엇입니까?” “용기란 무엇입니까?” “당신은 그것을 정말 알고 있습니까?” 처음에는 쉬운 질문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대답을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보통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어떻습니까?” “방금 하신 말씀과 모순되지 않습니까?” “그 말은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잠깐 대화를 나누려 던 사람이 어느새 철학 시험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화를 내면서 도망을 가기도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교실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아테네의 광장과 시장이 곧 교실이었습니다. 주로 정치가, 장군, 시인, 장인, 젊은이 모두가 대화 상대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에는 정답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직접 들여다보고 다시 고민하도록 하였습니다.
그의 질문은 잠든 생각을 깨우는 알람과도 같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글을 쓰지 않고 사람을 붙잡은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에서 활동했습니다. 당시 아테네에는 소피스트(Sophist) 라고 불리는 전문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소피스트는 주로 말하기와 논쟁 기술을 가르쳤습니다. 정치적으로 성공하려는 젊은이들에게는 매우 인기 있는 선생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수업료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달랐습니다. 그는 정식 강의를 열지 않았고 고정된 교육 과정도 없었으며, 자격증을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사람들과 대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대화가 상당히 불편했습니다. 누군가 “나는 정의를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소크라테스는 바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정의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대부분은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질문이 몇 차례 이어지면 설명에 빈틈이 생겼습니다. 예외가 나타났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도 드러났습니다.그때 상대방은 두 가지 중 하나의 반응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었군요.” 또는, “왜 이렇게 사람을 귀찮게 합니까?” 두 번째 반응이 훨씬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델포이의 이상한 신탁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활동에는 유명한 계기가 있습니다. 그의 친구 카이레폰(Chaerephon)이 델포이 신전의 신탁에 질문했습니다.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있습니까?”
신탁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없다.” 이 말을 들은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당황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대단한 지식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탁의 뜻을 직접 확인하기로 했습니다. “분명 나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을 찾아 신탁의 의미를 알아봐야겠습니다.”

그는 지혜롭다고 이름난 사람들을 찾아갔습니다. 먼저 정치가를 만났죠. 정치가는 자신이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질문하자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다음에는 시인을 만났습니다. 시인은 훌륭한 작품을 썼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항상 논리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다음에는 기술자와 장인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기술에 관해서는 실제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한 분야를 잘 안다는 이유로 다른 분야까지 모두 안다고 생각하는 경우였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마침내 신탁의 뜻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모르면서도 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적어도 제가 모른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모른다고 주장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핵심은 자신이 아는 것의 한계를 인정했다는 데 있습니다.
지혜는 자신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 지를 정확히 확인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는 알려 주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라는 말을 깨우는 등에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자신을 등에(Gadfly)에 비유했습니다. 등에는 말이나 소 같은 동물의 몸에 달라붙어 귀찮게 하는 곤충입니다. 아테네는 크고 화려하지만 조금 둔한 말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관습과 명예, 돈과 권력을 당연한 목표로 여기며 살아갔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런 말을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돈을 많이 벌면 정말 좋은 사람이 됩니까?”
“다수가 믿으면 그것은 진리가 됩니까?” “권력을 가진 사람은 정의도 잘 압니까?”
그는 아테네 시민들의 생각을 계속 찔렀습니다. 상당히 성가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런 성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질문이 없으면 사람은 쉽게 잠들고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눈을 뜨고 생활한다고 해서 생각까지 깨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아테네의 양심을 찔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등에가 분명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자신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너 자신을 알라. 고대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Temple of Apollo at Delphi, Apollonion)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격언입니다.오늘날에는 보통 이렇게 이해합니다. 진정한 내 모습을 찾으세요. 내 성격과 감정을 깊이 들여다보세요. 나만의 가능성을 발견하세요.
물론 이런 해석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철학과 연결해 읽으면 조금 다른 뜻이 드러납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우선 자신의 한계를 아는 일입니다. 내가 무엇을 아는지 알아야 합니다. 동시에 무엇을 모르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모르면서 안다고 믿는 상태가 가장 위험합니다.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질문할 수 있습니다. 배울 수도 있습니다. 생각을 고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이미 다 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지식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컵이 가득 차서 가 아니고 뚜껑까지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용감한 장군도 용기를 설명하지 못했다
플라톤의 대화편 <라케스, Laches>에서는 용기에 관한 대화가 펼쳐집니다. 라케스는 전쟁을 경험한 장군이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용기에 대해 잘 알 것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에게 묻습니다. “용기란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전투 중에 자리를 지키고 도망치지 않는 것이 용기라는 식의 답이 나옵니다.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한 가지 사례 만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전략적으로 후퇴해야 합니다. 무작정 자리를 지키는 행동이 오히려 어리석을 수도 있습니다. 병을 견디는 사람에게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가난과 두려움을 버티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용기는 단순히 전쟁터에서 물러서지 않는 행동일까요?
질문이 이어지자 장군은 처음의 정의가 흔들립니다. 사례는 경험이 많다고 해서 경험의 의미까지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운전을 오래 했다고 해서 안전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을 해 보았다고 해서 사랑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경험했다고 해서 반드시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프로타고라스의 연설을 멈춘 짧은 질문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는 당대의 유명한 소피스트였으며 유능한 연설가였죠. 많은 돈을 받고 젊은이들을 가르쳤습니다.
덕, 정치, 시민의 능력을 교육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에게 덕(Virtue)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여기서 덕은 단순히 착한 마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고대 그리스어 아레테(Arete)는 어떤 존재가 자신의 기능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탁월함을 뜻합니다.

프로타고라스는 덕에 정의, 절제, 경건, 지혜, 용기 같은 여러 요소가 있다고 말합니다. 소크라테스는 곧바로 묻습니다. “그 요소들은 금덩어리를 나눈 조각처럼 서로 같은 성질을 지닙니까?” “아니면 얼굴의 눈, 코, 입처럼 서로 다른 기능을 합니까?”
질문은 짧았습니다. 하지만 대답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소크라테스의 강점은 애매한 말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데 있었습니다. 그는 상대방의 말을 잘게 나누었고 뜻을 확인했습니다. 숨겨진 전제를 찾아냈습니다.
그 결과 겉으로는 멋있어 보이던 주장이 실제로는 모순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긴 말이 반드시 깊은 말은 아닙니다. 짧은 질문 하나가 긴 연설 전체를 흔들 수도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무지의 자각은 패배가 아니다
대화가 끝날 때마다 분명한 정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잘 모르겠습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난감한 상황입니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은 지적 패배가 당연히 아닙니다. 생각의 출발선을 정확히 찾은 것입니다. 길을 잃었는데도 현재 위치를 안다고 우기면 목적지에 도착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길을 잃었다고 인정하면 지도를 펼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철학은 이런 진리를 일깨우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 영혼의 산파술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소크라테스는 곧바로 정답지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에게는 정답지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산파에 비유했습니다. 산파는 아기를 대신 낳아 주는 사람이 아니고, 산모가 아기를 무사히 낳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는 지식을 상대방의 머릿속에 억지로 집어넣지 않았습니다. 질문을 통해 상대방이 스스로 생각을 하도록 도왔습니다. 이런 방법을 산파술(Maieutics)이라고 부릅니다.
마이에우티케라는 그리스어는 산파의 기술이라는 뜻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어머니 파이나레테(Phaenarete)가 산파였다는 이야기도 이 비유와 연결됩니다. 소크라테스가 돕는 출산은 생각의 출산이었습니다.
질문은 생각의 초음파 검사
소크라테스식 대화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먼저 상대방이 어떤 주장을 합니다. “용기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묻습니다. “위험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도 용감합니까?”
상대방이 답을 고칩니다. “위험을 알면서도 견디는 것이 용기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다시 묻습니다. “피해야 할 위험을 무작정 견디는 사람도 용감합니까?”
상대방은 또다시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질문이 이어집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상대방은 자신의 생각에 들어 있는 모순을 직접 확인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당신은 틀렸습니다 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상대방 스스로 자신의 대답이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질문은 생각의 초음파 검사와 비슷합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던 주장도 안쪽을 들여다보면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나타납니다.
가짜 생각을 낳을 수도 있다
모든 생각이 진리는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 있게 틀릴 수 있습니다. 근거 없는 믿음을 진실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고대 철학에서는 이런 불확실한 의견을 독사(Doxa)라고 불렀습니다. 한국어로는 흔히 억견 또는 의견이라고 번역합니다.
억견은 충분한 근거 없이 사실이라고 믿는 판단을 뜻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새로 태어난 생각이 건강한지 검사했습니다. 근거가 있는지 살폈습니다. 앞뒤가 맞는지 확인했습니다. 다른 사례에도 적용되는지 물었습니다.

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생각은 다시 고쳐야 했습니다. 상대방에게는 꽤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믿어 온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누구나 기분이 상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와 대화한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했던 것은 아닙니다. 철학 대화가 끝났는데 자존심만 사라진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포리아는 생각이 멈춘 막다른 길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종종 아포리아(Aporia)에 도달합니다. 아포리아는 길이 없다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논의를 계속했지만 확실한 답을 찾지 못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쉽게 말하면 생각의 막다른 골목입니다.

아포리아는 소크라테스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자신의 기존 생각이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새로운 탐구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내비게이션이 잘못된 길을 안내하고 있다면 먼저 멈춰야 합니다. 계속 빠르게 달리는 것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아포리아는 실패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잘못된 확신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정답을 얻지는 못했어도 가짜 정답 하나를 버렸습니다. 철학에서는 그것 만으로도 상당한 진전입니다.
사람은 왜 나쁜 행동을 할까
소크라테스 철학에는 매우 대담한 생각이 있습니다. 덕은 지식(Virtue is Knowledge)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입니다. 또한 아무도 자발적으로 악을 행하지 않는다(No One Does Wrong Willingly)는 명제도 등장합니다.
처음 들으면 쉽게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세상에는 일부러 남을 속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못인 줄 알면서 규칙을 어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화를 참지 못해 상처를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무도 일부러 악을 행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소크라테스가 말하려는 핵심은 조금 더 복잡합니다.사람은 어떤 행동을 선택할 때 자신에게 좋다고 보이는 것을 선택합니다. 문제는 진짜 좋은 것과 당장 좋아 보이는 것이 다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눈앞의 이익은 커 보입니다. 나중에 생길 피해는 작아 보입니다. 사람은 그 차이를 잘못 계산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해로운 행동을 선택합니다.
눈앞의 이익은 진짜 이익이 아닐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거짓말로 돈을 얻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순간에는 이익을 얻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신뢰를 잃을 수 있습니다. 불안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더 큰 거짓말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성품도 나빠질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관점에서 보면 이 사람은 진정한 이익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것입니다. 돈을 얻는 장면만 보았습니다.
영혼과 삶 전체가 입는 손해는 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영혼(Soul)은 한 사람의 생각, 판단, 성품, 삶의 방향을 이루는 중심을 의미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재산보다 영혼의 상태가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돈을 얻고도 비열한 사람이 되었다면 진정한 이익을 얻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알면서도 못 하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까
현대 독자라면 곧바로 반론할 수 있습니다. “몸에 나쁜 줄 알면서도 계속 먹습니다.” “공부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영상을 봅니다.” “화내면 후회할 줄 알면서도 화를 냅니다.” 이런 현상을 의지박약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스어로는 아크라시아(Akrasia)라고 합니다. 더 나은 판단을 알고도 욕망에 져서 다른 행동을 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를 독특하게 보았습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무엇이 더 좋은지 명확하게 안다면, 결국 좋은 것을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쁜 선택을 했다면 그 순간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건강의 중요성을 말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건강의 가치를 완전히 아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깊이 이해했다면 행동까지 달라져야 합니다. 오늘날의 심리학이나 윤리학은 인간 행동을 이보다 더 복잡하게 설명합니다.
습관, 감정, 충동, 환경, 중독, 사회적 압력도 행동에 큰 영향을 줍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현대 과학의 확정된 사실처럼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의 질문은 여전히 강력합니다. “당신은 그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습니까?”
아는 것과 외우는 것은 다릅니다. 진정한 앎은 삶의 방향을 바꾸는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이었습니다.
사람을 바꾸려면 영혼을 돌봐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잘못한 사람을 무조건 비난하지 않고, 왜 그 사람이 잘못된 것을 좋다고 판단했는지를 물었습니다.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살폈습니다. 어떤 착각에 빠졌는지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교육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닙니다. 좋은 삶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는 일입니다. 소크라테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영혼의 돌봄(Care of the Soul)이었습니다.
사람은 재산을 늘리는 일보다 먼저 자신의 판단을 돌봐야 합니다. 명예를 얻는 일보다 먼저 자신의 성품을 점검해야 합니다.
남을 설득하기 전에 자신이 옳게 생각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몸이 아프면 병원을 찾습니다. 그러나 판단과 성품이 병들었을 때는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은 영혼을 진찰하는 일이었습니다. 질문은 진찰 도구였습니다. 대화는 치료 과정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 검토되지 않은 삶
소크라테스는 결국 아테네 법정에 섰습니다. 그에게 제기된 공식적인 혐의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도시가 인정하는 신들을 믿지 않고 새로운 신 적 존재를 끌어들였다는 혐의였습니다. 또 하나는 젊은이들을 타락 시켰다는 혐의였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자신이 왜 철학을 계속했는지 설명했습니다. 그는 시민들에게 돈과 명예만 좇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지혜와 진리, 영혼의 상태를 먼저 돌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철학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받더라도 따르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에게 철학은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검토되지 않은 삶은 가치가 없을까
소크라테스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검토되지 않은 삶은 인간에게 살 가치가 없습니다.” 여기서 검토(Examination)는 자신의 믿음과 행동을 이성적으로 살피는 일입니다. “나는 왜 이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옳다고 믿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내 행동은 내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가치와 일치합니까?”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 보일까요?”

이런 질문을 하지 않으면 사람은 관습에 끌려가기 쉽습니다. 남들이 성공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대로 좇습니다. 사람들이 화내면 함께 화냅니다. 유행하는 의견을 자신의 생각이라고 착각합니다. 숨을 쉬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자기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선택을 점검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정해 놓은 기준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런 삶을 경계했습니다.
그는 철학을 삶으로 보여 주었다
소크라테스는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는 탈출할 기회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플라톤의 <크리톤, Crito>에서 보면 그는 탈출을 거부합니다.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이 나왔다고 해서 평생 존중해 온 법의 질서를 마음대로 깨뜨릴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 결정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쟁이 가능합니다. 국가의 부당한 판결에 복종하는 것이 옳은가? 정의롭지 않은 법도 따라야 하는가?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를 얼마나 존중했는가?
어느 것 하나에도 간단한 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원칙을 마지막 순간까지 따랐습니다. 그는 독배를 마시고 생을 마쳤습니다.
플라톤(Plato), 크세노폰(Xenophon),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같은 인물들이 서로 다른 모습의 소크라테스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특히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여러 대화 편의 중심 인물로 등장 시켰습니다.
그 결과 소크라테스는 2,400년이 넘도록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그 생각에는 어떤 근거가 있습니까?” “당신은 정말로 알고 있습니까?”
소크라테스가 오늘날에도 필요한 이유
소크라테스는 모든 질문에 정답을 준 철학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답이라고 믿던 것을 흔든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지식보다 먼저 지적 정직성을 요구했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해야 합니다. 애매한 단어는 뜻을 확인해야 합니다. 자신의 주장에 모순이 있다면 고쳐야 합니다. 다수가 믿는다는 이유 만으로 진실이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오늘날에도 필요합니다. 인터넷에는 수많은 정보가 있습니다. 누구나 전문가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짧고 강한 문장은 빠르게 퍼집니다. 하지만 자신 있게 말한다고 해서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크라테스라면 아마 이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그 정보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반대되는 사례는 없습니까?” “당신은 그 단어를 어떤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사실을 아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은 것입니까?”
철학은 정답을 외우는 과목이 아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철학(Philosophy)은 지혜에 대한 사랑(Love of Wisdom)을 뜻합니다. 지혜를 이미 가졌다면 사랑하며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철학자는 완성된 지혜를 가진 사람이 아니죠. 자신의 부족함을 알면서도 더 나은 답을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 철학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 질문을 통해 믿음의 근거를 점검해야 합니다. 셋째, 남을 이기기보다 함께 진리에 가까워져야 합니다. 넷째, 지식은 삶과 행동을 더 좋게 만드는 방향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다섯째, 재산과 명예보다 자신의 판단과 성품을 먼저 돌봐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삶을 계속 검토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완벽한 사람도 아니고, 그의 주장에도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가 실제로 어떤 말을 했는지 정확히 구분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소크라테스는 대부분 플라톤과 다른 저자들이 기록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철학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좋은 질문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세상을 향해 아주 짧은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리고 그 질문은 마침내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나는 지금 제대로 알고 있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