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 극복과 행복 3장은 고통 앞에서의 주체적 선택을 다룬다. 니체의 아모르 파티(Amor Fati)와 지독한 운명애는 주체적인 선택의 전형이다. 역경과 극복, 그리고 행복을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 볼 것인가?
내동댕이쳐진 삶, 운명을 저주할 것인가
예고 없는 불행이 우리의 삶을 덮칠 때가 있다. 거대한 해일이 평화로운 마을을 휩쓸어가듯, 역경(Adversity)은 우리의 일상을 무참히 파괴한다. 믿었던 사람의 배신, 갑작스러운 불치병의 선고, 혹은 공들여 쌓아온 사업의 몰락 같은 역경이다.
벼랑 끝에 선 인간은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지른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가혹한 일이 생기는가? 하나님은 왜 절 버리시는가? 분노와 억울함이 영혼을 잠식한다. 우리는 종종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Fate)을 저주한다. 고통에서 도망치려 발버둥 친다.

하지만 도망칠수록 고통의 그림자는 더욱 길고 짙어진다. 피할 수 없는 불행 앞에서 인간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렬한 해답을 내놓았다. 바로 아모르 파티(Amor Fati)다. 라틴어로 운명애(Love of Fate)를 뜻한다.
니체의 운명애는 단순히 현실과 타협하라는 뜻이 아니다. 어쩔 수 없으니 참고 견디라는 나약한 체념(Resignation)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닥친 지독한 고통과 끔찍한 비극마저도 삶의 필연적인 일부로 긍정하는 태도다. 오히려 그런 운명을 뜨겁게 사랑하라는 가장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선언이다.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철학자의 역설
니체가 운명애를 외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온실 속 화초가 아닌 정반대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니체의 삶은 참혹한 역경의 연속이었다. 그는 평생을 지독한 질병(Disease)과 싸웠다. 극심한 편두통과 위장 병이 그를 괴롭혔다. 눈이 멀어가는 고통 속에서 하루에 며칠 씩 구토를 하며 어둠 속에 누워 있어야 했다.

관계의 상처도 깊었다. 평생의 단 하나 뿐인 사랑이었던 루 살로메(Lou Andreas-Salomé, 1861~1937)에게 청혼했지만 처참하게 거절 당했다. 학계에서는 그의 전위적인 사상을 철저히 외면했다. 그는 평생을 지독한 고독 속에서 떠돌았다. 심지어 말 년에는 정신 착란에 빠져 10년이 넘는 세월을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병상에서 보냈다.
하지만 니체는 자신의 가혹한 운명을 결코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이 멀어가는 고통 속에서, 고독한 알프스 산맥의 차가운 방 안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서를 쏟아냈다.
그가 피를 토하듯 써 내려간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Thus Spoke Zarathustra, 1883)는 바로 자신의 처절한 고통 위에서 피어난 눈부신 연꽃과 같다. 그는 고통을 고통을 연료로 삼아 자신의 영혼을 가장 높은 곳까지 밀어 올렸다. 삶이 비극일지라도, 그런 비극의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주체적 인간이 되기를 열망했다.
악마의 질문, 영원 회귀를 감당할 수 있는가
니체는 저서 <즐거운 학문, The Gay Science, 1882>에서 소름 끼치는 상상 하나를 제안한다. 어느 날 밤, 절대적 고독 속에 빠져 있는 당신에게 악마(Demon)가 찾아온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인다.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온 이러한 삶을 너는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한다. 거기에는 전혀 새로운 것이 없을 것이다. 네 삶의 모든 고통과 기쁨, 모든 생각과 탄식, 네 생애의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 모든 것이 똑같은 순서로 말이다.

이것이 바로 니체의 핵심 사상인 영원 회귀(Eternal Return)다. 삶이 모래 시계처럼 무한히 뒤집혀서, 똑같은 사건들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끔찍한 가설이다. 악마의 이런 말을 들으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땅에 쓰러져 이를 갈며 악마를 저주하겠는가? 아니면 악마를 향해 너는 신이다 라고 환호하겠는가?
질문의 무게는 실로 압도적이다. 만약 자신의 삶이 치욕과 실패, 눈물과 끔찍한 질병으로 점철되어 있다면, 그러한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은 지옥일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요구한다. 그런 끔찍한 고통의 반복 앞에서도 당당하게 예(Yes) 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아모르 파티다. 자신 삶의 단 1초도 바꾸거나 지우려 하지 않고, 상처 받은 과거와 고통스러운 현재를 있는 그대로 완벽하게 긍정하는 위대한 용기다.
정신의 세 가지 변화: 낙타, 사자, 어린아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억울함과 분노를 넘어 운명을 사랑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883>에서 인간 정신의 세 가지 발달 단계를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바로 낙타(Camel), 사자(Lion), 그리고 어린아이(Child)다.
첫 번째 단계는 낙타이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짊어지는 존재다. 묵묵히 사막을 걷는다. 사회가 부과한 의무, 도덕, 타인의 시선이라는 무거운 짐을 군말 없이 견딘다.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Thou shalt)는 명령에 순종 한다. 역경이 닥치면 낙타는 그저 무릎을 꿇고 고통을 참아낼 뿐이다. 현대 사회의 수많은 사람들이 낙타처럼 살아간다.

두 번째 단계는 사자다. 정신이 점차 강해져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는 단계다. 사자는 기존의 질서와 가치관을 향해 포효한다. 나는 원한다(I will)라고 부르짖으며 자신을 억압하는 모든 권위에 저항한다. 역경 앞에서도 더 이상 수동적으로 당하지 않는다. 분노하고 싸운다. 하지만 사자는 파괴할 줄만 알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는 못한다. 저항과 분노만으로는 온전한 행복에 닿을 수 없다.
마지막 궁극의 단계는 바로 어린아이다. 사자의 맹렬한 분노가 가라앉고 나면 정신은 어린아이로 변모한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하며 망각(Forgetting)의 존재다. 새로운 시작이자 하나의 놀이(Play)다. 어린아이는 스스로 돌고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고, 거룩한 긍정(Affirmation)이다.
어린아이는 나는 존재한다(I am)라고 말한다. 모래성을 공들여 쌓았다가 파도에 휩쓸려 무너져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그저 까르르 웃으며 다시 새로운 모래성을 쌓을 뿐이다. 놀이 자체를 온전히 즐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린아이의 상태가 바로 니체가 말하는 위대한 인간, 초인(Übermensch, 위버멘쉬)의 모습이다. 극심한 역경이 닥쳐 기존에 쌓아둔 삶의 모래 성이 모두 무너져 내릴 수 있다. 이때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폐허 위에서 다시 춤을 출 수 있는 마음을 말한다. 불행이라는 파도마저도 삶이라는 놀이의 일부로 껴안는 태도가 초인이 가진 아모르 파티의 본질이다.
폭풍우를 정원사의 마음으로 껴안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정원사의 마음을 상상해 보자. 정원사는 봄이 오면 흙을 파고 정성스레 씨앗을 뿌린다. 여름의 뙤약볕 아래서 땀을 흘리며 물을 준다. 하지만 가을이 오기도 전에 무서운 태풍이 몰아친다. 애써 가꾼 꽃들이 모두 꺾이고 정원은 쑥대밭이 된다.

만약 정원사가 낙타라면 꺾인 꽃을 보며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것이다. 사자라면 험악한 날씨를 원망하며 도끼로 엉망이 된 정원을 모두 때려 부술 것이다. 하지만 운명애를 지닌 초인은 다르다. 그는 태풍 또한 거대한 자연의 피할 수 없는 일부임을 겸허히 인정한다. 꽃이 피어나는 환희의 순간뿐만 아니라, 비바람에 꺾이고 시드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모두 긍정한다.
비바람이 지나간 맑은 아침, 그는 묵묵히 장화를 신고 진흙탕이 된 정원으로 나선다. 부러진 가지를 쳐내고, 쓸려나간 흙을 다시 덮는다. 폭풍우가 남긴 잔해마저 이듬해 봄을 위한 비옥한 거름이 될 것임을 안다. 삶의 비극과 고통마저도 영혼을 살찌우는 비료로 삼는 것이 주체적 인간이 역경을 대하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삶의 방식이다.
상처를 발판 삼아 춤추는 자의 행복
지금 당신은 어떤 역경 앞에 서 있는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는가? 평생을 바친 목표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 절망하고 있는가? 그런 고통의 무게를 타인은 감히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가혹한 운명은 분명 우리를 잔인하게 물어 뜯는다.
하지만 본 연구소는 철학의 렌즈를 빌려 당신에게 강력한 연대의 메시지를 던진다. 운명은 우리의 육체를 병들게 하고 재산을 빼앗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주체적 선택권은 오직 우리 자신에게 있다.

고통을 부끄러워하거나 회피하지 마라. 상처를 향해 원망의 화살을 쏘지도 마라. 니체의 말처럼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뿐(What does not kill me makes me stronger)이다. 지금 당신을 짓누르는 그처럼 힘든 역경은 사실 당신을 위대한 초인으로 벼려내기 위한 운명의 뜨거운 담금질이다.
상처는 훈장이 되고, 고통은 춤을 추기 위한 무대가 된다. 삶의 모든 순간, 심지어 끔찍한 눈물의 밤까지도 절대적으로 긍정하고 사랑하라. 과거의 실수를 후회하지 않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단단한 마음이 지독한 운명애(Amor Fati)를 가슴에 품을 때, 우리는 마침내 외부의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깊은 행복에 도달한다.
진정한 행복 리부팅은 역경이 사라진 평온한 상태에서 만 오는 것이 아니다. 몰아치는 폭풍우 한가운데서 비에 젖은 채로 호탕하게 웃으며 춤을 출 때도 완성된다. 당신의 위대한 춤은 이미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