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 극복과 행복의 제 5장은 절망에서 탈주를 다룬다. 견고했던 삶이 무너져 내린 절망의 자리에서, 오히려 새롭고 자유로운 자아를 탄생 시키는 들뢰즈의 경이로운 철학을 담아 낸다.
견고한 성벽이라는 헛된 환상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전을 갈망한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삶의 주위에 단단한 성벽을 쌓는다. 안정적인 직장, 확고한 사회적 지위, 그리고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인간관계를 구축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와 정신 분석학자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 1930~1992)는 이처럼 굳어지고 정착하는 과정을 영토화라고 불렀다.

우리는 자신의 영토 안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자아(ego)는 마치 굵은 뿌리를 깊게 내린 거대한 나무(Tree)와 같다.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나무 형태의 사유 방식을 들뢰즈는 수목형(Arborescent) 구조라 칭했다. 모든 사람은 명함에 적힌 직함이나 사회적 역할이라는 뿌리를 내밀며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
하지만 자연의 섭리 앞에서는 영원히 견고한 성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역경(Adversity)이 몰아치면, 우리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영토는 순식간에 초토화 된다. 굵은 뿌리를 자랑하던 수목형의 삶은 거센 태풍에 밑동째 뽑혀 나간다.
구조조정, 사업 실패, 깊은 병환, 혹은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 같은 압도적인 역경 앞에서 인간은 모든 것을 잃고 절망한다. 존재의 근간이 흔들리는 끔찍한 공포를 경험한다.
탈 영토화, 비극으로 위장한 축복
인간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잿더미 위에서, 깊고 어두운 우울증(Depression)의 동굴로 숨어든다.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며 굳어진 절망 속에 자신을 가둔다. 하지만 들뢰즈의 시선은 전혀 다르다. 그는 무너짐의 고통을 긍정의 철학으로 완전히 뒤집는다. 들뢰즈의 시선으로 보면, 역경으로 인한 삶의 붕괴는 곧 탈 영토화(Deterritorialization)의 위대한 시작이다.

기존의 영토가 파괴되었다는 것은, 우리를 옥죄고 있던 사회적 잣대와 고정관념의 감옥이 함께 무너졌음을 의미한다. 안정적이라는 이유로 버티고 있던 지루한 일상, 타인의 시선에 맞춰 연기하던 가짜 페르소나(Persona)로부터 강제로 해방된 것이다.
익숙했던 세계와의 단절은 뼈를 깎는 고통을 수반한다. 하지만 껍질이 깨지지 않고서는 결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수 없다. 비극적인 무너짐은 사실 더 넓은 외부 세계로 나아가라는 운명의 강렬한 초대장(Invitation)이다.
뿌리가 잘린 자리에서 뻗어 나는 리좀
들뢰즈와 가타리의 대표적인 공저 <천 개의 고원, A Thousand Plateaus, 1980>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개념은 리좀(Rhizome)이다. 리좀은 감자나 고구마, 혹은 잔디처럼 줄기 없이 땅속으로 뻗어 나가는 뿌리 줄기 식물을 뜻한다. 중심 뿌리가 잘리면 그대로 죽어버리는 수목형 식물과 달리, 리좀은 줄기 한가운데가 끊어져도 다른 방향으로 무한히 새로운 촉수를 뻗어 연결된다.
극심한 역경은 우리 삶의 수직적인 중심 뿌리를 무참히 절단한다. 예를 들어 평생을 바친 직장이라는 굵은 뿌리가 잘려 나갔다고 가정해 보자. 나무의 삶을 살던 사람은 거기서 생을 포기한다. 하지만 리좀의 삶을 사는 사람은 그런 절단의 순간에 새로운 방향으로 눈을 돌린다.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하여 쉼 없이 달리던 한 남자가 예기치 않은 건강의 위기와 실패를 겪었다. 그의 거대한 나무는 쓰러졌다. 절망 속에서 방황하던 그는 어느 날 문득, 계절의 변화가 주는 소박한 경이로움에 눈을 뜬다. 그저 앞만 보고 달리느라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흙의 냄새, 봄 날 돋아나는 여린 새싹, 그리고 반려견과 함께 걷는 저녁 산책 길의 온기를 온전히 느낀다.
그는 정원을 가꾸고 식물을 돌보며 생명의 경이로움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소박한 기쁨과 사유를 글로 적어 블로그에 연재한다. 과거의 무거웠던 직함 대신, 일상의 철학을 나누는 작가(Writer)이자 자연의 관찰자라는 새롭고 다채로운 정체성이 뻗어 나간다. 중심이 절단된 비극적 순간이, 오히려 삶의 의미를 수평적으로 확장하는 리좀의 시작 점이 된 것이다.
노마디즘, 절망을 뚫고 솟구치는 유목의 삶
절망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사유를 딱딱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실패자다,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라는 고정된 결론은 인간의 내면을 병들게 하는 미시 파시즘(Micro-Fascism)이다. 들뢰즈는 이처럼 굳어진 절망을 깨뜨리기 위해 노마디즘(Nomadism), 즉 유목주의를 열렬히 주창했다.

노마드(Nomad)는 특정한 영토에 고착되지 않고, 새로운 초원과 물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민이다. 철학적 의미의 노마드는 사유의 정착을 거부하고, 고정된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하는 정신적 자유인(Free Spirit)이다.
비참한 역경은 우리를 정착민의 삶에서 쫓아낸다. 우리는 억지로 유목민이 되어 낯선 광야로 내몰린다. 거센 모래 바람이 부는 황량한 사막 앞에서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다. 하지만 노마드는 사막을 불모지라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곳을 무엇이든 새롭게 그릴 수 있는 텅 빈 캔버스로 여긴다.
노마드에게 길은 정해져 있지 않다. 내가 걷는 발걸음이 곧 새로운 길이 된다. 절망이라는 감옥의 벽을 허물고 미지의 영토를 향해 과감히 발을 내딛는 행위, 들뢰즈는 이를 가리켜 탈주선(Line of Flight)을 그리는 것이라 칭했다.
명사의 덫을 벗어나 동사로 존재하라
우리를 괴롭히는 큰 원인은 자아를 하나의 고정된 명사(Noun)로 인식하는 태도다. 부장, 사장, 가장, 혹은 반대로 실패자, 병자처럼 말이다. 이러한 명사들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비좁은 상자 안에 가둔다. 들뢰즈 철학의 눈부신 정수는 바로 인간을 명사가 아닌 동사(Verb)로 바라보는 데 있다.

그는 존재(Being)라는 정체된 개념 대신,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성(Becoming)을 강조했다. 인간은 결코 완성된 조각상이 아니다. 우리는 매 순간 무언가 다른 것으로 되어가는(Becoming-other) 역동적인 흐름 그 자체다. 물이 끓어올라 수증기가 되고,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찬란한 나비가 되듯, 존재는 쉼 없이 다른 차원으로 자신을 변화 시킨다.
역경은 강렬한 에너지로 이런 생성의 과정을 촉진한다. 나비가 되기 위해 번데기 속에서 육체가 완전히 녹아내리는 끔찍한 해체의 시간을 견뎌야 하듯, 우리의 옛 자아도 역경 속에서 철저히 해체된다.
이처럼 무너짐의 고통을 겪고 나면, 우리는 어제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지각과 감수성을 지닌 주체로 거듭난다. 타인의 고통에 더 깊이 공감하고, 일상의 작은 흔들림 속에서도 우주의 신비를 읽어내는 성숙한 자아로 진화하는 것이다.
탈주와 리부팅
혹시 여러분은 상실과 실패로 인해 잿빛 절망에 갇혀 있는가? 평생을 바친 수고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가? 역경은 결코 당신의 삶이 끝났다는 신호가 아니다. 오히려 당신을 옭아매던 낡은 껍데기가 비로소 벗겨졌음을 알리는 거룩한 해방의 신호다.
본 연구소는 들뢰즈의 목소리를 빌려 당신에게 제안한다. 이제 무너진 옛 성벽의 잔해를 붙잡고 눈물 흘리는 일을 멈추어라. 단단하게 굳어진 절망의 영토에서 과감하게 탈주선(Line of Flight)을 그어라. 당신은 나무 줄기에 목숨을 거는 연약한 생명체가 아니다. 무한한 대지를 향해, 수만 갈래의 눈부신 가능성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강인하고 위대한 리좀(Rhizome)이다.

결핍과 붕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텅 빈 광야에 선 고독한 노마드(Nomad)의 심장으로 주변을 둘러보라. 이전에 보이지 않던 사소한 기쁨 들, 소중한 생명과의 따뜻한 연결, 계절이 선물하는 일상의 철학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시련을 통과한 주체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역동적인 행복 리부팅이다.
삶은 명사가 아니라 뜨겁게 요동치는 동사다. 당신의 새로운 생성(Becoming)은 바로 철저하게 무너진 자리에서, 오늘 가장 눈부시게 새로움이 리좀처럼 시작되고 있다.
(참고문헌)
-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1980)
-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1968)
-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19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