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아이 섬에서 시간은 누구에게나 같은 속도로 흘렀습니다. 1955년 카우아이 섬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어느새 청소년이 되었습니다. 에미 워너(Emmy Werner)와 연구진은 그들의 삶을 다시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연구진의 관심은 고위험군 아이들에게 쏠렸습니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여러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가정이 매우 가난했습니다. 출생 전후에 건강 상의 문제가 있기도 했습니다. 부모가 알코올 문제나 정신 질환을 겪는 가정도 있었습니다. 부모의 갈등과 이혼이 반복되는 집도 있었습니다.
한 가지 어려움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여러 위험 요인이 한 아이의 삶에 겹쳐 있었습니다. 연구진은 아이들의 미래가 밝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예상은 상당 부분 맞았습니다.
카우아이섬 자녀 성장 과정의 심각한 어려움
카우아이 섬에서 여러 위험 요인에 노출된 아이 가운데 약 3분의 2는 성장 과정에서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일부는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 어려워했습니다. 학습 문제와 행동 문제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청소년기가 되자 문제는 더 커졌습니다. 비행 기록이 생긴 청소년도 있었습니다. 정신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일부 여성 청소년은 이른 나이에 임신했습니다. 연구진이 우려했던 상황이 실제로 벌어진 것입니다.
가난과 불안정한 가정 환경은 아이들의 성장에 분명한 부담이 되었습니다. 연구 데이터는 냉정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위험이 많을수록 이후의 문제도 늘어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결과만 보았다면 결론은 간단했을 것입니다.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난 아이는 불행한 어른이 된다.” 그러나 연구 자료 한쪽에서 이런 결론을 거부하는 아이들이 나타났습니다.
연구 데이터가 설명하지 못한 72명
연구진은 고위험군 자료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무언가 이상했습니다. 같은 위험 요인에 노출되었는데도 전혀 다른 길을 걷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학생은 72명이었습니다. 전체 고위험군의 약 3분의 1이었습니다.
이들도 가난했습니다. 가정 불화와 부모의 문제를 경험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여러 스트레스에 노출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과 달랐습니다. 이들은 아동 기와 청소년 기에 심각한 학습 문제나 행동 문제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학교생활에도 비교적 잘 적응했습니다. 가정과 사회생활도 안정적이었습니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현실적인 목표도 세웠습니다. 연구진은 이들을 유능하고(Competent), 자신감 있으며(Confident),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Caring) 청년들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학자들의 예상대로 라면 무너져야 할 아이들이었습니다. 콩 심은 데 콩이 나야 맞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달랐습니다. 연구 자료가 잘못된 것일까요? 아이들이 자신의 문제를 숨긴 것일까요? 아니면 연구진이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던 것일까요?
연구진의 예상을 넘어선 성장
72명의 아이들은 단순히 사고를 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학교에서 자신의 능력을 잘 활용했습니다. 친구들과도 비교적 원만하게 지냈습니다. 여러 활동과 취미에 참여했습니다. 반장이 된 아이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특별한 천재는 아니었지만, 자신이 가진 능력을 효과적으로 발휘했습니다. 교사와 부모는 이들이 책임감이 있고 목표 지향적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청소년기가 끝날 무렵에는 긍정적인 자아 개념도 발달해 있었습니다.
자아 개념(Self-Concept)은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이해하는 지를 뜻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렇게 생각하는 아이가 있는 반면, “상황은 어렵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있어.” 이렇게 생각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회복한 아이들은 두 번째 생각에 조금 더 가까웠습니다.
그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습니다. 이런 차이는 당장에 작아 보일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삶의 방향이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연구 방향, 실패 원인에서 회복 조건으로
당시 심리학과 정신 의학은 주로 문제의 원인을 찾는 데 집중했습니다. “무엇이 아이를 병들게 합니까?” “어떤 가정 환경이 비행 행동을 일으킵니까?” “어떤 위험 요인이 정신 건강 문제로 이어집니까?” 이런 접근을 병리 중심 접근(Pathology-Focused Approach)이라고 합니다.
병리(Pathology)는 질병이나 문제가 생기는 원인과 과정을 뜻합니다. 물론 중요한 질문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알아야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카우아이 연구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지게 했습니다.

같은 위험 속에서도 건강하게 자란 아이들이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연구진의 질문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무엇이 이 아이들을 달라지게 하였는가?”
질문의 방향이 달라지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연구진은 실패한 아이들에게 무엇이 부족했는지 만 보지 않았습니다. 잘 성장한 아이들에게 무엇이 있었는 지를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연구의 전환은 이후 발달 심리학의 중요한 흐름이 되었습니다.
카우아이 섬에서 상처 받지 않는 아이는 없었다
연구 초기에는 역경 속에서도 잘 성장한 아이들을 상처 받지 않는 아이 또는 무적의 아이처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마치 단단한 갑옷을 입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구가 계속되면서 이런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들도 상처를 받았습니다. 부모의 다툼을 보며 불안해 했습니다. 가난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외로움과 두려움도 경험했습니다. 이들은 돌로 만든 아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 초인도 아니었습니다.
차이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상처를 받았지만, 상처를 극복한 뒤 다시 삶을 이어 갔습니다. 여기에서 회복 탄력성(Resilience)이라는 개념이 중요해졌습니다.
회복 탄력성이란?
회복 탄력성(Resilience)은 역경 속에서 고통을 느끼면서도 다시 적응하고 성장해 나가는 인간의 내적 요인입니다. 공을 바닥에 던지면 다시 튀어 오릅니다. 그래서 회복 탄력성을 흔히 공의 탄성에 비유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고무 공이 아닙니다. 떨어진 즉시 같은 높이로 튀어 오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잠시 주저앉을 수 있습니다. 도움을 받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다시 방향을 찾는다면 그것 역시 회복입니다. 회복 탄력성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 힘으로 이해하면 잘못입니다. 무너진 뒤에도 다시 일어서고, 배우고, 움직일 수 있는 힘에 가깝습니다.
72명이 특별하였던 이유는
연구진은 72명의 아이들이 특별한 유전자를 타고났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천재적인 지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아이가 신체적으로 강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부유한 친척이 나타나 인생을 해결해 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개인의 특성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회복한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비교적 활동적이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문제 해결 능력과 의사소통 능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자신에게 어느 정도 선택권이 있다고 느끼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이를 내적 통제감(Internal Locus of Control)이라고 합니다. 내적 통제감은 세상의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믿음보다 “상황 전체는 바꿀 수 없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이 것 만으로 모든 결과를 설명할 수는 없었습니다.
연구진이 발견한 비밀
흥미로운 이야기에는 보통 비밀 열쇠가 등장합니다. 열쇠를 돌리면 모든 문이 열립니다. 그러나 사람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카우아이 연구 결과는 여러 보호 요인(Protective Factors)이 서로 연결된 결과였습니다.
보호 요인은 위험의 영향을 줄이고 건강한 적응을 돕는 조건을 뜻합니다. 연구진은 크게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확인했습니다.아이 자신에게는 문제 해결 능력과 사회성이 있었습니다. 가정 안에는 정서적으로 지지해 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정 밖에는 아이를 믿고 도와주는 교사, 친척, 이웃 또는 공동체 구성원이 있었습니다.

어떤 아이에게는 조부모가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어떤 아이에게는 교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또 다른 아이에게는 형제자매, 이웃, 청소년 지도자 또는 종교 공동체가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회적 지지(social support) 라고 합니다.
아이들의 회복 탄력성은 개인의 힘과 주변의 도움이 만나 형성된 과정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곁에는 반드시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무조건적인 지지가 아이의 회복 탄력성 생성에 영향을 준 것입니다.
운명은 통계보다 복잡하다
카우아이 연구가 가난과 가정 불화의 위험성을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열악한 환경은 분명 아이들의 발달에 큰 부담을 주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아이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연구가 보여 준 사실은 하나 더 있었습니다.

가정의 위험은 불행의 가능성을 높이지만 운명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어린 시절이 힘들었다고 해서 평생 불행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아닙니다. 아이에게 적절한 관계와 기회가 생기면 삶의 방향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카우아이 연구에서는 청소년 기에 문제를 겪었던 사람 중에서도 성인이 된 뒤 안정적인 배우자, 직업, 교육 기회, 군 복무 또는 공동체의 도움을 만나 회복한 사례가 확인되었습니다. 회복은 어린 시절에만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여러 시점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는 있었습니다.
연구가 남긴 중요한 질문
72명의 아이들은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설명할 수 없는 예외라고 단정 지을 수 있나요? 그들은 인간의 성장에 관한 중요한 단서를 보여 준 사람들이었습니다.
연구진은 연구의 시간이 늘어 날 수록 이들에 대한 질문이 달라졌습니다. 연구의 방향이 바뀐 것이죠. “이 아이에게 어떤 힘이 있습니까?” “누가 이 아이의 편이 되어 주었습니까?” “어떤 기회가 이 아이의 삶을 바꾸었을까요?” “위험을 줄이는 동시에 보호 요인을 늘릴 방법은 무엇입니까?”

카우아이 종단 연구는 문제 환경의 아이를 문제가 있는 대상으로만 보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들도 도움과 기회를 만나면 성장할 수 있는 존재로 바라 보았습니다.
그리고 연구진은 72명의 삶에서 반복되는 한 가지 중요한 장면을 발견했습니다. 장면에는 대개 아이 혼자만 있지 않았습니다.아이를 믿어 주고, 말을 들어 주며,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은 누군 가가 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 한 명 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 관계를 중심으로 아이의 능력, 책임감, 학교와 공동체의 기회가 함께 연결되었습니다. 한 아이의 삶을 바꾼 것은 기적의 열쇠 하나도 중요하였지만, 여러 보호 요인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그런 보호 요인이 무엇인 지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